결국 휴학을 했다. 형 자취방으로 짐을 옮겼고, 나를 정리할 시간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살아가다보니 잡생각이 너무 많이 떠올랐고, 삶이 공허하다고 느껴지면서 머리가 아팠다.
한 번은 털어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정리해본다. 내 고민은 `내가 좋아하는 게임과 그래픽스에 대한 길이 가도 되는 길일까?`, `이런 것들을 내가 정말 좋아하는게 맞을까?`였다.
전역하고 나서부터 이것저것 파고 들어보면서 나름 열심히 살았던 것 같다. 웹 프론트엔드, 게임 기획/개발.. 각각을 짧게는 2개월, 길게는 6개월 정도 공부해봤다. 짧은 시간이라면 짧은 시간이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맛보고 그 과정에서 보람도 느꼈다.
- 나는 개발을 왜 시작했나?
성적에 맞춰 지금 학과에 왔고, 다양한 트랙의 과목이 열리는 우리 학과 특성을 잘 활용해서 내 적성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트랙의 과목에서 열심히 했고, 개발과 기획 과목에서 성적이 잘 나왔다. 근데 기획 과목에서 내가 "이건 될 아이템이다."라고 생각했던 아이디어로 프로젝트를 진행했을 때는 낮은 점수를 받았다. '이건 좀 별론데..'라고 생각했지만, 다수결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진행하게 된 아이디어로 프로젝트를 진행했을 때는 높은 점수를 받았다. 아이디어에 대한 자신감은 줄어들었다.
혼란스러웠고, 내가 감이 부족한 것 같아 슬펐다. 나중에 형한테 고민을 털어놓으니까 "니가 하는 것들은 좋아하는 사람들만 진짜 좋아할 것 같긴 함."라고 했다. 다행히 홍대병이 있던 나는 위로를 느낄 수 있었다.(?)
처음 배웠던 개발은 사실 재미있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질문을 잘 못하는 내가 스스로 고민해서 짠 코드로 좋은 성적을 받았다는 사실이 나를 인정해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내가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곳을 따라갔다. 흠.. 근데, 하다보니까 은근히 재밌어지긴 했다. 그 땐 개발 분야가 이렇게 다양한지 몰랐지..
- 군대에서 웹 프론트엔드를 배우면서 느꼈던 것
군대라는 제한적인 환경에서 웹 개발 공부는 세상과 나를 소통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나는 흔히 말하는 성공을 하고 싶었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늘 의문을 품고 살아왔다. '내가 해낼 수 있는 사람인가?' 왜냐하면 나는 늘 한 번에 성공하는 일이 잘 없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웹 개발은 내 의문을 해소시키기 위한 도구로 사용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프로젝트를 할 때, 나는 프론트엔드 개발(사실상 퍼블리싱)로 입문했고, 페이지를 만들더라도 겉으로 보이는 완성도를 최대한 높이고 싶었다. 내가 배치한 오브젝트에 이유를 부여하며 배치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디자이너 분과 많이 소통하면서 나름의 디자인적인 완성도를 챙기려고 노력했다. 그러다보니 이걸 내가 왜 하고 있지?' 싶었다. 나는 프론트엔드 개발로 이름이 올라 갈 것이고, 디자인은 디자이너를 믿고 맡기면 되는 일이긴 했다. 추가적으로 나에게 좋으려면 개발을 해야 하는 건데 다른 사람에게만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행동은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좋지 않은 기분을 나에게 전달해줬던 것 같다. 그래서 이 분야가 내 적성에는 맞지 않다고 판단했다.
(다시 돌아보면, 그냥 직무를 디자인으로 변경하거나, 프론트엔드 개발 실력을 더 높이고 디자인에 대해 더 공부해보는 것이 방법이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 게임 개발로
그렇게 복학하고는 게임 관련 수업을 들었고, 게임 개발 스터디와 프로젝트를 했다. 운이 좋게 상을 받은 적도 있었고, 내가 생각해낸 부분에 대한 구현과 디테일을 깎는 시간과 그 과정은 정말 즐거웠다. 알고리즘 공부도 하고, 게임 개발 관련 아카데미에서도 공부하면서 조금은 성장한 상태로 다음 학기를 맞이했다.
그 학기에는 주어진 일에만 집중하면서 정신없이 살았다.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 억지로 간소화된 결과물을 제출할 때가 있었는데 슬펐다. 그런데 정말 의외로 성적과 프로젝트 성과는 역대급으로 성공적이었다. 분명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는데, 지쳐서인지 목적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겉만 번지르르해진 느낌? 가기로 했던 그래픽스 연구실에는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휴학을 결심했다. 이 길을 내가 걸어가는게 맞는지, 사실 이 일을 내가 즐겁다고 합리화하고 있는건지에 대해서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 힘든 시기에
그저 누워있는 것도 질리려고 하는 때에, 마음도 다잡을 겸 쿠팡 물류센터에도 갔다왔다. 모여있는 사람들 속에서 어떤 얘기를 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다. "개수가 다가 아니야. 무게도 생각해야 한다니까?" 그리고는 서로 웃더라. 그 사람들은 우수사원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 목표가 흐려진 채 바래져 버린 놈은 목표를 가진 사람을 두고 웃지 못한다ㅠㅠ.
- 정의 내리기?
철학 관련 수업에서 철학가들은 사고를 정의내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들었다. 철학에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던 나도 이들을 따라서 삶에서 늘 무언가를 정의내리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내가 무언가를 얼만큼 좋아하고, 무언가는 어떤게 얼만큼 좋고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생겼다(사고의 역량이 부족했던 것일 수도 있겠다.). 또, 휴대폰 볼 때 종종 개발자 미래가 어떻고 이쪽 분야만 살아 남을 것이라는 등의 내용들을 보곤 했는데, 나는 이런 텍스트들에 잡아먹히곤 했다.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닌데, 문득, 검증되지도 않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쓴 허상의 텍스트들이 나를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것들로부터 벗어나 흔들리지 말고 내가 좋다고 느끼는 길에서의 정도를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